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하이 전투 (문단 편집) === [[우쑹 전투]] === >중국인들은 펜으로 쓸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찬미를 바쳐야 하는 용기로, 믿을 수 없는 고초에 맞서고 있다. >---- >종군기자 헤셀 틸트먼 8월 23일 우쑹 해안가에 일본군 증원군 2개 사단을 태운 일본군 함대가 나타났다. 일본군 3사단은 우쑹만의 오송잔교에, 11사단은 우쑹 서북 15킬로미터 지점의 촨사전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마련했다. 상하이 이북을 포위 점령하는 것이 일본군 중앙통수부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우쑹 지역은 장제스가 1935년부터 군사고문 팔켄하우젠의 권고에 따라 콘크리트 벙커와 기관총 진지로 이루어진 매우 촘촘한 방어선을 꾸려놓은 곳이었다. 거기에 지뢰밭, 철조망까지 해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해변에 내린 일본군 3사단 병사들은 중국군의 집중 사격에 많은 인원이 전사했다. 탄약은 금방 떨어졌고 일본군은 일본도와 총검을 들고 반자이 어택을 감행하다가 격퇴당했다. 3주가 지난 후 우쑹 해안가에 제일 먼저 상륙한 3사단은 96%가 전투불능에 빠지는 등 지리멸렬했고 경악한 3사단장 후지타 스스무 중장이 후퇴를 고려할 정도였다. 후퇴라는 말에 경기를 일으키는 일본군 특성을 고려해보면 그만큼 중국군의 저항이 격렬했던 셈이다. 8월 31일이 되어서야 일본군은 겨우 우쑹 포대를 점령했지만 불과 3킬로미터 전진했다. 11사단 역시 고생하긴 마찬가지였다. 6일 동안 겨우 5킬로 전진한 그들은 교두보를 마련했지만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 곧 공세종말점에 도달했다. 절망적인 자살 돌격이 이어져 한달 만에야 겨우 상하이 남쪽의 뤄뎬전까지 전진했지만 거기에도 강력한 중국군 방어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9월 28일이 되어서야 뤄뎬전이 함락되었다. 중국군의 피해도 50%에 달했지만 이들은 질서정연하게 상하이로 퇴각하는 규율을 보여주었다. 3사단과 11사단은 1주일만에 도합 4천명의 사상자를 냈고 한달이 지난 시점에서 1만명을 잃으면서 병력의 삼분의 일을 잃었다. 이런 분전을 참관한 팔켄하우젠은 8월 29일 "비록 완전히 적을 축출하지 못했지만 계속해서 곳곳에서 수비를 한다면 적이 전진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낙관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이렇게 성공적인 방어전을 기획한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 군사고문으로 근무하면서 최고무공훈장인 [[철십자 훈장#s-1.3.3.1|푸어 르 메리트]] [[훈장(상훈)|훈장]]을 받은 인물로, 이후 1927년까지 드레스덴 [[보병]]학교의 교관으로 있었다. 즉 이론가임과 동시에 '''경험이 부족한 군대를 그럭저럭 싸울 줄 아는 군대로 바꿔본 경험이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때의 공적 덕분에 장제스는 1950년 팔켄하우젠의 72세 생일에 친전을 보내 팔켄하우젠을 '''중국의 친구'''라고 일컬었다. 중국 입장에서는 진짜 제대로 된 [[군사 고문단|고문관]]이었던 셈이다.] 9월 6일 중국군은 총공격을 정지하고 지구항전 태세로 전환, 상하이 시가지와 난징 사수를 목표로 제2기 작전에 돌입했다. 9월 17일 나점-강만-묘행진 선으로 후퇴한 중국군은 21일에 3작전군으로 재편성, 우익 작전군 사령관에 [[장파쿠이]], 중앙 작전군 사령관에 [[주사오량]], 좌익 작전군 사령관에 [[천청]]을 임명하고 저항선을 새로 구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